A bend in the road

길모퉁이

3/22/20231 min read

road between trees
road between trees

와인딩 힐스...

굽이 굽이 굽은 우리 동네 길.

그 길들 사이로 높게 솟은 나무들과 집들이 어울어져 꽤나 한적한 느낌을 준다.

그 굽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동네의 가운데 쯤에는 탁트인 호수가 하루 종일 햇살에 빤짝인다. 물이 햇살에 어찌나 보석같이 빛나는지...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빛나는 물의 호수'를 떠올리게 한다. 이른 아침 그 보석들을 내 눈에 가득 담고 하루를 시작할 때면 나도 앤처럼 꽤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며 설레어진다.

여름 아침엔 이슬 먹은 잔디 향이 상쾌하고 해질녁엔 우편물을 확인 하러 나오는 이웃의 인사가 따뜻한 동네. 많은 나무들 덕분에 사계절이 먼저 찾아오는 우리 동네. 정겨운 이웃이 많은 동네.

얼마전에 우리 이웃 사촌 로라가 운동 부족인 나에게 같이 동네 한바퀴 돌 것을 제안했다. 나와 생일이 같은 우리 동네 친구 로라. '검은 머리에 희고 고운 피부, 장미빛 뺨, 즐거운 미소를 지닌' 로라는 빨강머리 앤의 가장 친한 친구인 다이애나 배리를 연상하게 한다.

푸석한 나의 피부에 항상 엉클어진 머리, 그리고 나의 수다스러움은 빨강머리 앤을 많이 닮았다.

앤이 다이애나가 자신과 친구하고 싶어하는지 걱정했듯이 나도 이렇게 다소곳 하고 차분한 로라가 나와 친구하고 싶을까, 걱정했었다.

항상 친절하고 미소가 많은 로라.

언젠가는 한국의 작은 어촌 마을에 일년간 머물며,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고, 일년 내내 글을 쓰며, 마을이 떠나가라 노래를 불러 보고 싶다는 나의 소박한 꿈도 멋진 꿈이라며, 나는 언젠가 그 꿈을 꼭 이룰 것이라며 고운 얼굴로 활짝 웃어주는 친구.

그녀의 집은 항상 맨 발로 걸어 다녀도 먼지 하나 발에 묻지 않을 만큼 깨끗하다.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면 양말을 하나 준비해 오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다.

다소곳, 정갈하다, 하안색, 친절, 환한 미소, 소곤 소곤한 말투. 그녀를 생각하게 하는 말 들이다.

햇살이 그녀를 닮아 싱그럽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던 어느 오후에, 로라와 나는 마치 앤과 다이애나가 산책을 하듯 서로 하하 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으며 동네 구석 구석을 걸었다. 물론 웃을 때 입을 손으로 다소곳이 가리는 사람은 로라 뿐이었다.

굽이 굽은, 이 Winding Hills 길을 따라 걷는 다는 건 참 흥미로운 일이다. 쭉 뻗은, 넓은 길을 가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가는 길의 먼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길모퉁이를 만나면 우리가 가던 길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며 막다른 길에 다를 때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 미로와 같은 이 길들. 우리의 삶과 많이 닮지 않았나 생각하며 걷는다.

또 한 번의 길모퉁이를 돌아 쭉 뻗은 길을 오를 때 쯤, 운동 부족인데다 말을 너무 많이 해 벌써 숨에 허덕이고 있었을 쯤, 그 길의 끝에 쯤에서 험하고 매서운 눈과 커다란 회색 덩치를 가진 핏불이 나를 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때에 마추진 두려움.

로라는 다소곳한 말투와 상냥한 목소리로 "제인, 우리 돌아가는게 좋겠어." 미소를 띄며 말을 한다.

이 상황이 믿을 수 없는 제인은, 소리 지르며 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그래, 그게 좋겠어." 차분한 로라를 따라 나도 애써 미소를 지어 보려 한다. 하지만 삼옥타브 올라간 끽 소리나는 나의 목소리와 부들부들 떨며 올라가는 나의 입꼬리에 로라는 내가 떨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게 정말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머리 속은 하얘지고 내 몸은 갑자기 일어날 고통에 대비해 증가한 호르몬 들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제인, 그냥 차분이 있으면 돼." 나를 보며 미소를 띄는 로라.

나는 그녀를 따라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나의 마음을 가라 앉힌다.

그 사이, 이 덩치 큰 회색이가 무섭게 달려와 그 매서운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며 심하게 짖고 있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경고하듯 으르렁 대며 우리를 노려 보는 회.색.이.

로라는 회색이를 미소를 띄며 바라본다. 로라는 언제나 미소를 띈다.

허겁지겁 이 회색이를 뒤따라 오던 회색이의 주인은 너무 미안하다며,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게 아니라며 어린 아이 타이르듯 회색이를 타이른다.

"제인, 우리 다시 걸을까?" 로라는 언제나 처럼 미소로 말을 건넨다.

어떻게 저렇게 차분할 수가 있을까...

너무 놀란 나의 눈엔 지금 사자굴에서 살아나온 제인과 로라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니엘도 저렇게 차분했을까?

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다리는 후들 후들 떨리지만, 이미 시작한 걸음, 끝까지 가야 한다.

우리는 가던 길에서 뒤돌아 다시 굽어진 길을 걷는다.

정다운 미소의 로라가 두려움이 많은 내 옆을 동행 해준다.

길을 돌아 다시 걷기 시작한 우리.

다음 길모퉁이를 돌 때에는 어떤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두려워 하기 보다는, 지금 이 길 위에 놓여진 작은 것들을 감사하며 즐기기로 했다.

'찬란한 빛의 호수'도, 길가에 꽃들도, 푸르른 나무들도... 우리가 자주 놓치는 길가의 아름다운 것들에 감사하며 감탄하다 보니, 어느덧 집에 다다랐다.

길모퉁이에서 우리의 방향을 바꿔야 했지만, 회색이가 쫓아와 두려웠지만, 계속 걷다보니 우린 참 많은 것을 보았고, 얘기했으며, 즐거웠다.

또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회색이와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회색이의 입을 굳게 닫으셔서 물리지 않았던 제인과 로라의 무용담으로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남을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저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다른 길이 없다면...절망하고 주저 앉기 보단, 그 길 옆에 핀 꽃들을 즐기며 차분히 걸을 수 있다면...

그리고 길모퉁이를 돌아 생각지도 못한 두려움을 마추질 때, 내 옆을 동행해 주는 기분 좋은 우정이 그 곳에 함께 있다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는 꽤 많은 길을 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에게 굴곡같이 보이는 길들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와인딩 힐스의 제인은 초록 지붕의 앤의 마지막 구절을 따라 혼잣말을 해본다.

"이 길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전 가장 좋은게 있다고 믿을래요!"